최근 한국교회안에는 "이슬람 포비아"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그래서
2월에서는 특집으로 '이슬람 포비아가 온다'라는 주제를 다루었습니다. 여기에서 "
"을 섬기시는 송강호님은 '기독교 포비아를 먼저 생각하라'는 의미심장한 글을 쓰시기도 하셨습니다.
의 원장이신 문상철목사님의 글이 눈에 뛰었습니다. 이 글을 통해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이슬람 선교에 대해 바른 관점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전투적인 종교는 인류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교훈이다. 그런데도 세계 종교들은 종종 정치
세력과 결탁되어 전투적인 모습을 띤다. 전투적인 종교는 종종 전투적인 선교를 한다. 전투적인 선교는 문명간, 문화간 충돌과
갈등의 원인이 되며,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의 고통을 오히려 증대하기도 한다. 이런 투쟁적인 종교의 모습, 선교의 양상이 과연
해당 종교의 본래적인 모습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많은 경우에 투쟁적인 양상을 띠는 이슬람권에서 사역하는 기독교 선교사들은 자기도 모르게 투쟁적인 마인드를 가지기 쉽다.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의 경우 이러한 경향은 더욱 심각하다. 더러 전투적인 선교 태도는 오래 동안 사역을 해도 큰
진전이 없는데서 오는 초조함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했지만, 어차피 통하지 않으니 한번 맘대로 해보자는 심리가
지금까지 견지해온 온건한 방법을 버리고, 무모할 만큼 직접적이고 투쟁적인 모습으로 선교를 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전투적인 선교는 인류의 보편적인 선과 소망에 어긋나기 쉬우며, 선교의 전망에 대한 비관적인 태도는 복음의 본래적인 초월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킨다. 우리는 이런 어두운 시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한 소망은 근본적으로 인간과 기관이
중심이 된 선교에서 벗어나,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중심이 된 삼위일체적 선교관을 회복할 때 얻게 된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지만, 하나님이 중심에 없는 선교는 생각보다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이런 선교관의 회복이 있을 때 우리는 거칠고,
성급하고,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선교 활동에서 벗어나 성경적인 선교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선교연구원(KRIM)의 가장 최근의 한국 선교에 대한 통계 조사에 의하면, 2002년말 기준으로 전체 10,422
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163개 선교 단체를 통해서 164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문상철 2003, 1). 이 가운데 이슬람권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사들의 총수는 1,510 명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한국 선교사의 14.5%가 이슬람권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도표 1).
이슬람권 국가들 가운데 한국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상주하고 있는 나라는 인도네시아인데, 이곳에는 모두 244 명의 한국
선교사들이 있다. 인도네시아 다음으로는 터어키(202명), 우즈베키스탄(139 명), 카자흐스탄(122 명), 말레이시아(90
명), 키르키즈스탄(84 명), 방글라데시(79 명), 이집트(73 명), 파키스탄(69 명), 요르단(50 명) 등이
이슬람권의 주요 선교 대상국들이다 (도표 2).
인도네시아의 경우 전체 외국인 선교사 1,663명 가운데 14.7%가 한국 출신의 선교사들인데, 이 숫자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것이다.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상당수 나라에서 한국 선교사들의 숫자는 미국 선교사들의 숫자 다음으로 많다. 이슬람권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도 한국 선교사의 숫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인 것으로 파악된다.
제3세계의 상당수 선교 국가들의 사역자들이 자국 내의 필요에 따라 자국 내에서 활동해야 하는 반면, 해외에서의 활동이
가능한 한국 선교사들은 미국, 영국 등 주요 선교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권 선교에 대한 영향력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슬람권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의 증가율 면에서 한국은 가장 빠른 증가율을 보이고 있고, 그만큼 한국 선교의 비중은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이런 위상을 고려할 때 한국 선교는 보다 책임있는 선교의 모델들을 제시해야 하며, 선교 역사가 짧은 만큼 선교
역사상 저질러졌던 과오들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각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 선교는,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이슬람권에서 서구 선교보다 좋은 성과를 보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단체이기는 하지만, 이라크 등 분쟁 지역에서는 무척 위험스런
접근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한국 교회의 이슬람권 선교는 지나치게 공격적인 접근을 하는 경우와,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기회의 때를 기다리는 접근을 하는
모습을 함께 보여왔다. 우리는 이 두 방법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야 하며, 적극적이면서도 위협적이지 않고, 조용하면서도 창의적인
방법들을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접근법이 창의적일수록, 현재보다 더 부드럽게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믿으면서 우리는 과거 역사의 교훈에 힘입어 조용하면서도 창의적으로 일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만 할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시스(
Francis of Asissi, 1181/2-1226)는 제 5차
십자군 전쟁 중 이집트 원정대에
동행했으나, 군사적인 일들과는 거리를 두고, 순수하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노력만을 했다. 그는 분노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서 무슬림들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분쟁의 시기에 프란시스와 프란시스회원들은 단순성과 신적 사랑의 접근법으로 어려운
상황에 대처했던 것이다.
프란시스가 몸소 실천한 이러한 사랑의 원리는 후대의 이슬람권 선교사들에게 중요한 행동의 기준을 제시한다. 1221년
제정된
프란시스회의 첫번째 규칙은 무슬림 지역에 살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 지침을 제공하는데, 그 첫번째 사항으로는,
“프란시스회원들은 평화롭게 살아야 하며, 심한 토론이나 논쟁을 피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두번째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한 다음 그런 판단이 설 경우 준비를 잘 해서 전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기꺼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과 자신의 신체를 포기하면서 적에게 스스로를 노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Kerr 1996, 8).
이런 사랑의 정신은 후대 선교사인 트리폴리의 윌리엄(1220-91)이 교황 그레고리 10세에게 무슬림들은 무력이나 논쟁의 힘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신앙의 내적 논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이끌릴 수 있음을 강조한 것에서도 나타난다
(P. Throop, 115-46; GMI CD 2000, 22-23).
프란시스회원들의 이러한 접근법은 스스로의 방어를 위해서도 무력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로코 등 북아프리카에서 다수의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순교의 각오를 한 프란시스회원 선교사들의
우정 전도는 오늘날의 이슬람권 선교를 위한
중요한 통찰력과 방향을 제공한다. 이런 접근법은 특별히 분쟁 지역에서 논리적이고 지적인 도미니크회의 접근법보다 더 효과적임이
입증되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이슬람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에 대한 반감이 높으며,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못하는 무슬림들이 기독교를 침략자들의 종교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이라크 등 이슬람권에서의 공격적인
선교는 단기적인 부분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무슬림 선교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며, 선교사들과 현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테러 가능성을 높일 소지가 있다. 우리는 1843년과 1846년 쿠르드 지역에서의 선교 활동의 결과로 수많은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집단 학살을 당한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Hill 1988, 88). 외국인 사역자들은 맘껏 전도 활동을
하다가 추방되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현지인들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프란시스의 교훈은 더디더라도 사랑의 원리에 충실한 선교적 접근법을 추구하게 한다. 이런 사랑의 접근법은 중동 지역뿐만
아니라 EU 등 무슬림들이 소수 집단인 지역에서도 똑같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가 테러를 당하고, 공격을 당해도
우리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프란시스의 정신을 지켜야 할 것이다. 그리 할 때 이슬람보다 우위에 있는 기독교의 복음을 온전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2) 레이몬드 룰: 영혼 구원의 열정과 선교 변증법
레이몬드 룰(
Raymond Lull, 1232-1316)은 회심 이후 40대부터 비교적 늦은 나이에 선교적 활동에
가담했으며, 순교적 열정에 사로잡혀 수차례에 걸쳐 북아프리카에 선교 여행을 떠났다. 튀니지에서 공개적으로 전도를 한 결과
투옥되고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힌 동안에도 무슬림 지식인들과 교리적인 논쟁을 하기도 했다. 노년에 이를수록 룰은
스페인 왕의 추천서를 휴대해서 공식적으로 접근하는 등, 보다 조심스럽고 주도면밀한 접근법을 보이게 된다. 룰은 82세의 나이에
부기아의 시장터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다 성난 군중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게 되었다 (Kerr 1996, 8-10; Tucker
1983, 52-57).
룰은 첫 선교 여행에서부터 선교학적 변증법으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그의 변증적 접근법은 지나치게 지적인,
전형적인 도미니크적 접근법이라기보다 프란시스회적 요소들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그 자신이 도미니크회 선교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나중에 프란시스회에 가입한 것이 이러한 면을 잘 설명해 준다. 룰 역시 아시시의 프란시스처럼 칼에 의한 개종을
거부했으며, 십자군 전쟁 자체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변증법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했으며, 그 길만이
그들의 영혼을 얻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룰의 선교학적 업적 가운데 중요한 한 부분은 상황화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룰은 특별히 이슬람과 교통하는 공통
언어로서 신비주의를 사용한 첫 기독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두 종교 사이에 접촉점을 찾으려는 이러한 상황화 노력은 스페인의
무슬림 신비주의자인 이븐 알-아라비(Ibn al-Arabi, 1165-1240)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룰은 신과 인간의
만남을 나와 너의 인격적 만남의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변증법을 시도하였다 (Kerr
1996, 8-10). 무슬림들에 대한 이런 접근법은 룰이 그 시대를 훨씬 앞서간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레이몬드 룰의 교훈은 오늘날 상황화의 노력이 단순히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술적인 노력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영혼
구원의 열정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함을 지적한다. 무슬림권에서의 우리의 상황화의 노력은 복음의 정통성을 보전하려는 노력과 함께
문화적 특성에 따른 창의적인 표현성 사이에서 어느 한편으로 편향되지 않고, 이 모두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종교다원주의가
널리 받아들여지는 상황에서, 다원주의 전통이 어쩌면 기독교보다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이슬람 전통을 생각할 때,
다원주의에 바탕을 둔 인식론적 틀을 고려한 변증법을 개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슬람권의 많은 곳에서 무력 충돌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의 변증법은 상호 이해와 화해를 촉구하는 접근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선교는 이슬람권에서의 선교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단순한 흑백논리를 벗어나서, 균형있고 섬세한 전도와 변증을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3) 헨리 마틴: 학자적 탐구, 종교간 대화, 교파간 에큐메니컬 정신
헨리 마틴(
Henry Martin, 1781-1812)은 개신교 선교사 중에서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사역한 최초의 선교사들
중 한 명이다. 31세에 요절하기 전까지 비록 6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만 사역했지만, 그는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고
아르메니아에서 성경 번역과 종교간 대화를 통한 전도를 했으며, 교파간 협력을 통해 에큐메니컬 정신을 보여 주었다. 그의 일기는
영국에서 고전이 될 만큼 그 경건성은 후대의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의 영성은 신앙의 힘으로
너무나 날카로운 자연적 성격의 약점을 극복한 그리스도인의 표상이 되고 있다 (Sargent 2001[1819]).
헨리 마틴이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에서 선교전략적으로 한 획을 그은 것은 그의 학구적인 탐구 정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학자적 자세는 인도로 가는 배 안에서 벵갈어, 우루드어, 페르시아어, 아랍어 등의 문법을 섭렵하고,
나중에 우루드, 페르시아어, 아랍어 성경 번역에 착수한 것을 통해서 쉽게 드러난다. 또한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과 함께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임을 인식하고 이슬람에 대한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런 학자적
접근법 못지 않게 그의 선교적 접근법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람들을 중시하는 “영혼 중심의
접근법(soul-centered approach)”이었다 (Bennett 1994, 269). 그는 책에 기반을 둔 전도 노력을
하는 대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우정을 쌓고, 개인적인 대화를 통해 전도의 기회를 찾으려고 했다. 마틴은 이런 방식이 논쟁을
통한 변증법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믿었다.
헨리 마틴의 별명들은 그가 개인적인 경건성의 함양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표출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는
인도인들을 집에 자주 들여서 접대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배풀었기 때문에 “검은 성직자(the Black Clergyman)”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페르시아에서는 그와 대화를 나눈 수피 신자들에게서 “메르디 코다이(하나님의 사람)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Bennett 1994, 267-268).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이런 모습은 그의 학문성과 함께 어우러져서 무슬림들을 향한
대화식 전도의 접근법을 낳았던 것이다. 헨리 마틴의 이런 접근법은 종교간 대화를 위한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교리적 토론에만
국한하지 않고, 개인적인 대화의 자리에서 사람들의 실존적 질문들을 다룬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교간 및 개인적
대화에 대한 이런 태도는 사람들이 논쟁에 의해서 회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감동될 때 회심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마틴은 그 자신이 성공회의 군목 신분이었으나, 침례교 선교사인 윌리엄 케리 등 타 교파의 사람들과 오히려 더 가깝게
동역했으며, 교리적인 거리가 상당히 먼 로만 카톨릭과 아르메니아 정교회의 신부들과도 기꺼이 협력하는 에큐메니컬 정신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면모는 사소한 교리적인 차이에 의해 쉽게 나누어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일삼는 경향이 있는 우리에게 귀한 교훈이
된다.
군목 신분이었기 때문에 국가적인 이해 관계에 얽매이기 쉬운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헨리 마틴은 후대의 영국
선교사들과는 달리 제국주의의 틀에서 스스로를 엄격하게 분리하고 오직 영적인 원리에 따라 선교 활동을 하는 입장을 취했다. 마틴의
이런 면은 선교사들이 흔히 본국의 정치적, 외교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실질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숭고한 규범에 의해 일해야 함을 보여준다.
헨리 마틴의 잦은 병치레와 요절은 체계적인 선교사 돌봄체제가 없는 가운데 오직 영혼 구원의 열정에 사로잡혀 자신을 돌보지
않은 선교사의 고통을 말해 준다. 헨리 마틴이 다른 선교사들처럼 장수했다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우리는
한 선교사를 체계적으로 돌보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해하게 된다.
이슬람권에서 영적, 문화적, 심리적 억압을 오래 경험한 선교사들이 다소간 건강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선교사들은 특히 거친 선교를 할 때 더욱 소진의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생각된다. 한국 선교사들은 자신의 전인적인 건강을
위해 스스로 노력을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충만히 받을 때 건강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인식을 해야
할 것이다.
아시시의 프란시스, 레이몬드 룰, 헨리 마틴은 단지 특정 종파의 위대한 선교사들이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서구 선교의
위인들이 아니다. 그들은 선교 역사가 짧고, 선교의 노하우가 적은 우리 한국 선교를 위해서도 귀한 본을 보여주었다.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 무슬림 선교의 탁월한 본보기들이 많지 않다면 우리는 서구 전통 속에서 귀한 통찰력과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특별히 분쟁의 시기에 그들이 거칠고 요란한 선교를 하지 않고, 부드러우면서도 효과적인 선교를 한 것에서 영감을 얻게 된다.
3. 부드러운 이슬람권 선교를 위하여
1) 성육신적 삶의 양식을 구현하자.
첫째,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회복하자. 이는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본이지만, 종종 등한시 된다.
둘째, 자기희생적인 아가페적 사랑을 이웃에 실천하자. 종족, 문화, 종교간 충돌은 지구촌의 심각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화해의 매개자들로서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사랑의 영성과 리더쉽이 필요하다.
셋째, 하나님의 샬롬을 고통 받는 이웃과 나누자. 고통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실존 문제이다. 이런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령 안에서의 샬롬 밖에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중보자 그리스도가 있는 삶과 신앙의 차별성을 나타내
보이자.
2) 성육신적 사역을 실현하자.
첫째, 우리 사역의 주체가 사람이나 기관인지, 하나님인지 살피자. 선교사는 추수의 일꾼이지 주인이 아니다. 기관적인,
혹은 개인적인 목적의식에서가 아니라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빠진 선교는 단체간
경쟁에 빠진다. 또한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게 된다. 하나님이 배제된 가운데 잘못된 동기로 하는 인간적인 선교를 지양하자. 순수한
영혼 구원의 열정에 바탕을 둔 선교 사역을 전개하자.
둘째, 우리 사역의 대상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의
성육신적 접근법이 거친 선교를 방지한다. 성육신의 본보기에 근거를 둔 선교는 일방적인 주입식 선교가 아니라, 세상의 필요를
채우는 선교를 하게 한다. 이를 위해서 선교사들은 교리적 비판에 앞서 현상학적으로 타종교와 타문화를 연구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내부자적 관점에서 종교간, 문화간 차이점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계관 차원에서의 비평을 통해 그 세계관의
궁극적 필요를 파악하고, 그 공백을 메우는 선교를 하자.
셋째, 문화와 종교를 넘어선 하나님의 초월적 진리를 보여주자. 성령이 임한 교회는 언어와 문화적인 분파로 인한 분열을
넘어서 초월적 진리를 나타내는 공동체를 보여 주었다. 그러한 공동체는 진리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진리의 실체를 보여 주었다.
이 진리와 성령의 공동체는 분열과 분리를 치유하고, 모든 인류가 공히 갈망하는 창조 질서의 회복, 즉 구원을 제시한다. 보혜사
성령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 가교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종교다원주의와 상대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진정한 해답이다. 우리는 진리의 성령 안에서 분명하면서도 부드러운 대화식 전도의 기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IT 기술 등
첨단 기술을 이용한 선교도 성령 안에서 영감을 받을 때 부드러우면서도 혁신적인 선교의 도구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성육신적 원리에 어긋나는 방법들
첫째, 분쟁 지역에서 특정 국가나 정치 세력에 결탁된 기회주의적 선교를 하지 말자. 특별히 전쟁의 와중에서 생긴 단기적
기회에 집착하여 장기적으로 선교의 가능성을 줄어들게 만드는 일을 삼가자. 분쟁의 와중에서 현지인들이 필요로 하지도 않는 건물들을
지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지 말자. 특정 교단과 교회 및 선교회의 영역을 넓히고, 그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선교를 하지 말고,
순수하게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선교를 하자.
둘째, 종교간 갈등이 심화되는 지역에서 타종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고, 타문화를 무시하는 전투적인 선교를 하지 말자.
그것은 타종교와 타문화가 옳아서가 아니라, 그런 직접적인 공격이 선교적인 효과를 내기보다 부작용이 더 심하기 때문이다. 논쟁을
할 때도 다른 문화 및 종교적 전통을 존중하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자신의 멧세지를 전달하는데도 더 효과적이다. 거친 논쟁의
분위기보다 부드러운 대화의 분위기가 상대의 방어 수단을 내리게 한다. 사랑의 원칙과 방법이 항상 효과적이다.
셋째, 대규모 재정 투자를 필요로 하는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하지 말자. 대형 건설 프로젝트는 그 건물들의 유지관리가
어렵기 때문에 현지 교회가 계속해서 선교사와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게 한다. 이슬람권에서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대형 건설 프로젝트를 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체계적인 성경 공부와 제자훈련이 필요한 지역에서 한국식 신학 교육을 고집하기
위해 필요 규모 이상의 신학교를 짓거나, 한국 교단을 이식시키기 위해 교회를 경쟁적으로 세우려고 하는 제국주의적 선교를 하지
말자. 선교 전문가들은 돈이 많이 드는 건물 위주의 선교 프로젝트보다 영혼 구원을 위한 사람 위주의 접근법이 더 효과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건물을 짓기보다 사람을 치유하고, 세우고, 밀어 주는 작은 선교가 더 효과적이다.
4. 결어
21세기 초반 이슬람권 상황은 거친 선교보다 부드러운 선교를 요청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바탕을 둔 선교는
조용하면서도 확실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선명한 선교이다. 이런 선교를 할 수 있는 영적, 신학적, 문화적 성숙성과 유연성을 우리
모두에게 허락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by 문상철 원장